한 10년 전만 해도, 아이가 학교에서 뭔가 지각을 하는 등의 잘못이 있으면 선생님이 매를 드는 일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습니다. 20년 전에는 더 자주 볼 수 있었고, 30년 전에는 별 이유도 없이 아이들을 체벌하는 선생님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이른바 전근대적인 교육방침에 대한 반대급부인지, 최근 몇 년 들어 학생들에게 체벌은 커녕, 잘못에 대해 혼내는 것조차 변변찮은 실정이 되었습니다. ‘어린시절의 주변 어른들의 폭력적인 언사가 아이에게 트라우마를 심어준다’ 같은 아동 심리학의 주장이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초등교사의 경우, 아이가 친구에게 욕을 하거나 온 학교를 뛰어다니면서 소리를 지르는 것 같은, 명백히 아이가 잘못한 상황인데도 반성문 한 장을 못 쓰게 한다며 고충을 토로했습니다. 아이가 집에 돌아가서 부모님께 ‘선생님한테 혼났다’고 얘기했다가는 부모님이 학교를 찾아와서 왜 아이에게 혼을 냈냐며 되레 역정을 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희는 이러한 실정에 다음과 같이 되묻고 싶습니다. 이게 정상적인 실태인가요?

소위 아이들을 ‘훈육’ 내지는 ‘교육’한다는 것에는, 아이들이 이 사회에서 잘 적응할 수 있게끔, 즉 사회적 기준에 걸맞게 자기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게끔 하는 일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명백합니다. 이런 점에서 ‘사회화’라는 말을 쓰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아이의 잘못이 분명한 상황에서, 그 잘못을 지켜만 보고 있어야 할까요? 그 잘못을 지적하고 혼을 낸 선생님에게 되레 역정을 내는 게 정상적인 교육과 훈육일까요?

다시 20~30년 전처럼 아이가 무슨 잘못만 했다 하면 매부터 들거나 폭언을 쏟아붓자는 소리가 아닙니다. 다만, 이른바 교육자들이 ‘교육’을 하기 위한 적합한 환경을 만들어주자는 것입니다. 자녀의 육아, 교육 등의 전문가로 알려진 아주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건강의학과 조선미 박사님에 의하면, 아이 훈육의 스펙트럼은 어릴적 대소변을 가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알아서 학교를 다니고 공부를 하게끔 하는 것까지 다양하다고 합니다.(출처https://youtu.be/PoNG97pv8DY )

 

그리고 그 모든 스펙트럼들은 각각의 생애 주기에 맞는 ‘사회화’의 정도에 따릅니다. 예를 들면, 3살쯤 되면 대소변을 화장실에서 볼 수 있어야 하고 10살 정도 되면 초등학교에 혼자 다닐 수 있어야 하며, 17살쯤 되면 학교 공부를 알아서 따라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아이의 자유를 제한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아이는 이렇게 반문하며 훈육을 거부할지도 모릅니다. “왜 학교를 가야 해요?” “왜 공부를 해야 해요?” “왜 친구한테 나쁜 말을 하면 안 돼요?” 요즘의 많은 부모님들은 아이가 이렇게 말하면 쩔쩔매며 그 이유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아이를 사회화 시키려면 어쨌든 자유를 제한해야하긴 하는데, 뭔가 ‘합리적인’ 방법으로 제한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소위 합리적이고 인자하고 민주적인 부모가 되고 싶은 것, 즉 ‘좋은 부모’가 되고 싶은 건 모든 부모님들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좋은 부모’가 되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아이의 훈육을 망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미성년 시기의 아이들은 즉각적인 욕구를 바로바로 드러내는 편이고, 아이가 사회화되고 훈육된다는 것은 곧 이 욕구들이 좌절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조선미 박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훈육의 본질은 좌절의 내구력을 키우는 것”이라고. 이런 좌절의 경험을 잘 시켜놓지 않으면, 아이는 자기가 불편한 상황에 놓이는 것에 대해 ‘갑’의 위치에 섰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제부터 하기 싫은 공부를 해야 한다고? 어쩔 수 없지’ 하는 생각 대신, ‘내가 왜 하기 싫은 공부를 해야 하는지 어디 한 번 설명을 해봐요!’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를 이렇게 키우고 싶은 부모님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제안하고자 하는 바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때로는 ‘비합리적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아이가 해야 하는 것에 대해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둘째, 아이 훈육에 주변 어른들이 일관된 태도로 임할 것.

1. ‘민주시민’의 교육은 그다지 ‘민주적’이지 않은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아이가 해야 할 일에 책임을 다하게 하는 데에는, 당연히 아이의 거센 저항이 따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좌절에 익숙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멋대로 학교를 가지 않거나, 말썽을 부리거나, 공부를 하지 않거나 하는 등 자기 책임을 다하지 않았을 때는, 패널티를 부여해야 합니다. 그 패널티가 때로는 일견 비합리적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그 점을 들어 부모님을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어붙일 때에는 밀어붙일 필요가 있습니다. 혼날 짓을 하면 혼나야 하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하게끔 만들어야 합니다. 아이 스스로가 누릴 수 있는 자유란, 제멋대로 무엇이든 해도 좋다는 자유가 아닌, 사회에서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의 자유라는 것을 인지시켜야 합니다.

 

이 교육이 조기에 가정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아이는 나중에 학교생활을 비롯한 단체에서의 활동에서 반드시 더 큰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집에서야 혼나는 정도의 패널티로 그칠 문제들이, 사회 밖으로 나오면 더 큰 패널티를 받게 됩니다. 아이의 나이가 듦에 따라,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책임과 그에 따르는 권한이 점점 커지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아이에게 주어진 책임이 무엇인지, 사회적 의무는 무엇인지, 그에 따르는 권리는 무엇인지, 또 어디까지의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지 등등의 교육은, 그야말로 소위 ‘민주시민’을 양육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교육의 과정은 부모님이 바라든 바라지 않든, 그리고 아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비교적 ‘반-민주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2. 일관되지 않은 훈육 태도는 아이를 혼란스럽게 한다

아이를 교육하다보면 반드시 아이를 혼내게 됩니다. 태어날 때부터 사회적 기준에 꼭 맞는 아이는 이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이걸 혼을 내야하는지 말아야하는지 그 상황이 분명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컨대 엄마가 보기엔 아이를 혼내야 하는 이슈인데, 아버지가 보기엔 혼낼 것 까지는 아닌 이슈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조차도, 부모님을 비롯한 주변 어른들의 훈육 방침이 일관될 것을 권합니다.

즉 어머니가 혼내고 있는데 아버지가 말린다든지, 아버지가 혼내고 있는데 어머니가 말린다든지 하는 일은, 오히려 아이 훈육에 방해가 됩니다. 아이 입장에서는 자기가 한 일이 그래서 잘못인지 아닌지를 혼란스러워하게 되고, 설령 잘못이라고 인지하더라도 자기를 감싸는 어른의 뒤로 숨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따라서, 아이를 둘러싼 주변 어른의 훈육 방침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아이가 보는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 대신에 나중에 따로 이야기를 나누고 협의를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는 비단 아버지/어머니 사이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이의 교육 내지는 훈육에 참여하는 모든 어른들에게 권고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한 아이에게 달라붙어 관리에 참여하는 멘토 선생님들에게는 모두 일관된 목소리로 공부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해 주기를 당부하곤 합니다. 마찬가지로 부모님들 또한 저희가 아이를 진심으로 지도하고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일관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아이의 교육 내지는 훈육이란, 아이가 결국 어떤 권위에 자발적으로 순응하게끔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먼저 가정 교육의 주체인 부모의 권위가 서야 하고, 아이의 교육에 참여하는 수많은 ‘선생님들’의 권위가 서야 합니다. 조선미 박사님의 다음과 같은 말로 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친구같은 부모가 되면 아이들은 부모를 친구보다 더 막 대해요. 친구는 아이를 통제하거나, 보호할 수 없어요.” (참고:https://youtu.be/MWnEAli-pz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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