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이 자발적으로 책을 읽는다는 건 기적적인 일이다

이 제목을 읽고 비슷한 고민이 들어 이 글을 읽어보게 된 부모님들이라면, 축하드립니다. 실로 대부분의 아이들은 소설조차도 읽지 않기 때문입니다. <완득이> <까칠한 재석이 시리즈> <아몬드> 등의 이른바 청소년 성장 소설이든, <해리 포터> <트와일라잇> <헝거 게임> 등의 판타지 소설이든, 아이가 활자에 관심을 갖고 자발적으로 나서서 책을 읽는다는 일은 거의 기적적인 일입니다. 특히 고등학생이라면 분기별로 치러지는 내신 시험과 모의고사 준비를 하느라 매일매일이 정신없고, 시험이 끝나면 곧바로 수행평가 대비를 하느라 독서를 할 시간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학생들 뿐만 아니라 직장인들도, 시간을 내서 책을 읽는 일은 실로 어렵다는 것을 맞벌이 부모님들이라면 잘 이해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장르를 불문하고 자녀가 자발적으로 독서를 하게끔 하는 것부터가 난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아직 고등학생이 아닌 예비 고1과 예비 중3 학생들의 경우, 비교적 학업에 대한 부담이 적은 만큼 미리 독서를 해 두는 게 좋음에도, 아이가 책읽기를 거부하곤 하기 때문입니다. 책을 안 읽는 아이들을 읽게 만드는 일은, 아이가 읽는 책의 장르를 바꾸는 것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만약 아이가 판타지 소설이나 무협지같은, 소위 '가벼운' 책들만 읽어서 고민인 부모님들은, 이미 이 난관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니 축하받을만 합니다.

그럼에도, 부모님들은 아이에 대해 조금 더 욕심을 냅니다. "아이가 문학은 좋아하고 찾아 읽는데, 비문학(산문)도 찾아 읽었으면 좋겠어요" 하고. 말하자면 스토리가 있는 문학 작품에서, 정보 전달을 중심으로 하는 산문으로 관심의 방향을 옮기고 싶다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어렵지 않습니다. 이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아이가 소설에만 왜 소설에만 관심이 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그 해결책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오락을 목적으로 하는 텍스트라도, 심도 있는 비평이 가능하다

부모님들이 불만스러운 건 아이가 무협지, 청소년 성장 소설, 판타지 소설, 라이트노벨 등의 소위 '가벼운' 소설들만 읽으려 한다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같은 소설이라도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찰스 디킨스, 조지 오웰, 셰익스피어, 헤밍웨이와 같은 이른바 고전 명저들을 아이가 찾아 읽는 것에 불만을 가질 부모님은 희소할 것입니다. 전자의 소설들이 오락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에, 아이의 학습에 방해가 될 공산이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어느정도 일리가 있는 생각입니다. 실로, 아이들이 위와 같은 '가벼운' 텍스트들을 선호하는 것도 그것이 흥미롭고 재미있는, 다시 말해 오락적이기 때문입니다. 오락을 목적으로 하는 텍스트를 오직 오락으로만 체험한다면, 공부와는 다소 동떨어진 체험을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텍스트의 목적이 오락일지라도, 분명 그 주제, 서사, 연출 등에 심도 있는 비평은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텍스트는 어떤 렌즈로 바라보냐에 따라 그 의미와 맥락이 변모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서울대학교 종교학과에서는 영화 <매트릭스>(1999)를 고대 그리스의 신비주의(mysticism) 전통으로 해석합니다. 한편 철학과에서는 같은 영화를 인식론(epistemology)과 존재론(ontology) 전통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텍스트로 이해합니다. 정치외교학부에서는 <춘향전>을 조선 성리학의 이데올로기적 파워와 이른바 유교 문화 하에서 여성이 정치권력을 전유하는 서사를 그린 텍스트로 해석합니다. 또, 비교적 최근 영화인 <토이 스토리4>(2019)를 실존주의 텍스트로 해석할 수 있고, <엘리멘탈>(2023)을 다문화 다민족 공동체의 공존 문제를 다룬 영화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위 문단의 내용을 한 문장도 이해하지 못했더라도 괜찮습니다. 다만, <매트릭스>, <토이 스토리>같은 상업 영화에서도 실로 심오한 주제의 비평이 가능하고, <춘향전> 같이 누구나 그 내용과 서사, 결말을 아는 '진부한' 텍스트로부터도 지적인 질문과 대답을 발굴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 주었으면 합니다. '가벼운' 텍스트는 말초적인 재미를 주지만, 동시에 그것에 대해 충분히 지적으로 풍부한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풍부한 해석이란 곧 부모님들이 바라는 '비문학' 읽기를 통해 훈련되는, 구조 독해, 행간 읽기, 주제 파악, 사실관계 파악 등의 역량을 요구합니다. 다시 말해, 아무리 오락 목적의 텍스트라도 그 텍스트를 비평하는 일은 '비문학' 읽기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구조적 사고력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읽을지의 감수성을 기르려면

요컨대, '무엇을' 읽느냐보다 중요한 건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오락용 텍스트를 읽더라도, 거기서 어떤 의미를 발굴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능력을 계발하기 위해서는, 비슷한 관심사를 가졌지만 더 섬세하게 텍스트를 읽어낼 수 있는 선생(멘토)가 필요합니다. 스스로의 힘 만으로 진부했던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는 일은 어렵기 때문입니다. 기존에 오락을 목적으로 텍스트를 읽어가던 아이는, 비슷한 텍스트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는 멘토와 만나, 자기가 생각하지 못했지만 설득력 있는 해석들에 반복적으로 노출되어야 합니다. 원래부터 자기가 관심을 갖고 있는 텍스트를 대상으로 하므로, 학생은 텍스트에 대한 '더 좋은 해석'에도 흥미를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해야 저런 해석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에 스스로 천착하게 됩니다. 이 때 학생을 이끄는 멘토는 별다른 말 없이 책 한 권을 슥 내미는 겁니다. 아이가 천착한 바로 그 물음을 심화시키거나, 그에 답을 줄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을 제안하는 '비문학' 책을.

여기, 한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 있습니다. 이 학생은 SF영화와 소설을 좋아했습니다. 중학생 때 <스타워즈> 시리즈를 다 찾아 보았고, 필립.K.딕의 <마이너리티 리포트>,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같은 디스토피아 장르의 소설을 좋아했습니다. 그 아이의 멘토는 학생이 좋아하는 소설들을 듣고, 곧장 아이가 윤리학, 철학, 정치사상, 사회정의 등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아챕니다. 선생님의 추천을 받아, 아이는 비슷한 주제를 담고 있는 소설인 조지 오웰의 <1984>를 시작으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존 롤스의 <정의론>,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등의 이른바 '고전'들을 거침없이 읽어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범박한 독서였지만, 일주일에 하루이틀 정도는 시간을 내서 책을 읽고, 선생님과 토의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학생이 보는 국어, 영어 시험에 나오는 글들이 너무 쉽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문장 하나 하나가 수수께끼 같은 고전들과 비교하면, 시험에 출제되는 문장들은 너무 간명하고 분명하게 내용을 전달하고 있었습니다. 독서의 부산물(?)로서, 내신 시험과 모의고사, 수능에 이르기까지 국어와 영어에서 단 한 번도 1등급을 놓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또한 독서를 통해 깊어진 사고와 대화는 생활기록부에도 고스란히 기록되어, 이후 이 학생이 서울대학교에 수시 합격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됩니다. 후에 이 학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수능 공부보다 더 값진 체험은 독서의 와중에 일어났고, 그 길잡이로서 선생님들이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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